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1인당 소득이 높아지면 출산율은 낮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고민은 저출산이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해도 상황은 정반대였죠. 1970~80년대, 인구 과잉은 국가적 문제였고, 보건소에는 다양한 피임법을 적극적으로 교육했습니다. 이 시기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경구피임약은 많은 여성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했고, 사회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피임약을 먹는 것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 자체를 차단하는 물리적 방식보다 분명 편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복용해야 하고 그 작용 원리를 잘 모르면 부작용에 대한 불안도 생기기 마련이죠. 그렇다면 이 작은 피임약은 과연 몸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기에 임신을 막을 수 있는 걸까요? 정자와 난자를 무력하게 하는 일종의 독약 같은 걸까요? 경구피임약은 에스트로겐(estrogen)과 프로게스틴(progestin, 합성 프로게스테론)의 혼합물입니다. 에스트로겐은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여포자극호르몬(Follicle-stimulating hormone, FSH)의 분비를 억제하여 여포의 성숙을 방해하고, 프로게스틴은 황체형성호르몬(Hormona foliculoestimulante, LH)의 분비를 억제하여 배란을 막습니다. 이 두 호르몬이 함께 작용하면 배란 과정이 효과적으로 억제되어, 난자가 난소에서 배출되지 않죠. 수정이 일어날 가능성도 매우 낮아집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조금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에스트로겐이나 프로게스테론은 대표적인 여성호르몬으로, 자궁에서 수정과 임신을 돕는 역할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 왜 오히려 피임에 쓰이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여성의 월경 주기, 즉 몸속에서 일어나는 호르몬의 정교한 조율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성의 월경 주기는 마치 한 편의 오케스트라 공연과도 같습니다. ‘지휘자’인 뇌와 뇌하수체가 전체를 조율하고, 여러 ‘악기’인 호르몬들이 각각 순서에 맞춰 연주하면서 생명의 무대를 준비하죠. 그렇게 월경주기라는 네 악장의 음악이 완성됩니다. 공연은 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특히 시상하부는 성선자극호르몬 방출호르몬(GnRH)이라는 시작 신호를 보내고, 이를 받은 뇌하수체는 두 가지 중요한 ‘악기’인 여포자극호르몬(FSH)과 황체형성호르몬(LH)에게 연주를 지시합니다. 이 때 여포자극호르몬의 자극을 받은 난소에서는 여러 여포가 자라기 시작하는데, 이 중 하나가 우세하게 성장하죠. 여포란 난자의 성숙과 배란을 준비하는 작은 주머니 같은 구조입니다. 성장한 여포는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 에스트로겐은 마치 무대 조명을 밝게 켜듯, 자궁 내막을 점점 두껍게 만들어 임신을 위한 환경을 갖추게 도와줍니다. 이렇게 첫 번째 악장은 여포가 성장하고 에스트로겐이 등장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이윽고 두 번째 악장이 시작됩니다. 자궁 내막이 충분히 두꺼워지면, 뇌하수체는 황체형성호르몬을 급격히 분비하는 ‘LH 서지(surge)’를 일으킵니다. 이는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는 강렬한 신호음과 같죠. 우세하게 성장한 여포는 이 신호를 받아 마침내 난자를 배출하며 배란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때가 공연의 클라이맥스이자, 난자가 수정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순간이죠. 배란이 끝나면 세 번째 악장이 이어집니다. 난자를 배출한 여포는 황체라는 구조로 변합니다. 황체는 프로게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기 시작하는데, 자궁 내막을 더 두껍게 하고 안정시켜서 수정된 난자가 착상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죠. 자궁은 착상이라는 최종 단계를 기다리며 조용하게 준비 상태에 들어갑니다. 마지막 네 번째 악장은 이별과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만약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황체는 점차 퇴화하고 프로게스테론 농도도 급격히 줄어듭니다. 그 결과 자궁 내막이 탈락되어 월경(menstruation)이 시작되죠. 이로써 여성의 몸속에서 매달 펼쳐지는 이 공연은 한 주기를 마치고 새로운 주기를 위한 준비 단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1악장의 주인공인 에스트로겐은 여포자극호르몬의 신호로 증가하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오히려 여포자극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합니다. 또한 배란 이후 분비되는 3악장의 프로게스테론 역시 황체형성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하죠. 이처럼 각 단계의 호르몬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음성 되먹임(negative feedback)’ 조절을 통해 월경주기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경구피임약은 이처럼 정교하게 조율된 오케스트라 연주 중간에 박자가 엉키면서 멈춰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피임약은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틴을 꾸준히 공급해, 뇌하수체가 여포자극호르몬과 황체형성호르몬을 분비하지 않도록 만들죠. 그 결과 여포는 성숙하지 못하고, 배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경구피임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임신을 막기 위한 또 다른 장치들도 함께 작동시킵니다. 자궁내막의 두께와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는데요, 피임약 복용 시 자궁내막이 얇아져 수정란이 착상하기 어려워집니다. 또 자궁경부의 점액은 더욱 끈끈해져 정자의 이동을 방해합니다. 경구 피임약은 생리주기를 방해하는 듯 보이지만, 피임약을 단기간 복용하다 중지하면 일정한 패턴으로 조절되는 리셋 효과도 줍니다. 덕분에, 불규칙한 월경주기나 생리통 완화에 도움이 되죠. 무엇보다 큰 의미는 여성의 선택권을 넓혔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가족 계획을 설계하고, 사회 진출과 경제적 독립에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 종교권에서는 인공적인 피임 수단에 대하여 윤리적, 신학적 논란을 제기해 왔습니다. 가족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 가치와 맞물린 교리 때문이죠. 하지만, 경구피임약의 작용은 완전히 인공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사실 수유 중에 일어나는 자연 피임과 본질적으로 유사하죠. 모유 수유 시 분비되는 호르몬인 프로락틴이 뇌하수체를 자극하여 성선자극호르몬 방출호르몬, 여포자극호르몬, 황체형성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하고, 그 결과 배란이 지연됩니다. 결국 피임약은, 잠시 ‘엄마가 된 척’하도록 만들어 몸속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잠시 멈춥니다. 새로운 무대가 열리지 않게 하는 조용한 조율 장치인 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