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 놓은 사과나 감자를 공기 중에 두면 표면이 갈색으로 변하는 ‘갈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는 과일이나 채소에 포함된 물질들이 산화되기 때문인데요. 이런 산화 반응에는 효소가 관여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갈변 반응에는 효소가 관여합니다. 사과, 바나나, 감자, 홍차 등 식물성 조직에는 카테킨, 카테콜, 갈릭산, 티로신 같은 페놀 화합물이 풍부한데, 이들이 산화되어 색이 변하게 됩니다. 화학에선 하이드록시기가 있는 유기 분자를 알코올이라고 부릅니다. 일상에서 말하는 알코올은 주로 에탄올을 지칭합니다. 우리가 술을 마시면 체내에서 에탄올이 산화되어 분해가 시작되지요. 에탄올과 구조는 다르지만 페놀 역시 화학적으로는 알코올의 한 종류입니다. 에탄올처럼 산화될 수 있습니다. 과일 속에서 페놀 형태로 존재하는 알코올이 산화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바로 갈변입니다. 산화란 전자를 잃는 반응이며, 환원은 전자를 얻는 반응입니다. 페놀이 전자를 잃고 양성자까지 잃으면 퀴논이라는 물질이 됩니다. 이 반응에는 ‘폴리페놀 산화효소(polyphenol oxidase)’라는 효소가 관여합니다. 과일의 껍질이 벗겨지거나 손상되면 이 효소가 공기 중 산소와 접촉해 반응이 시작됩니다. 페놀로부터 나온 전자는 효소를 거쳐 산소로 들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갈색 색소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갈변이지요. 바나나는 이런 산화 반응으로 단맛이 증가하기도 합니다. 홍차, 코코아, 자두 등은 의도적으로 이 반응을 활용해 색과 풍미를 더하기도 합니다. 효소가 관여하지 않는 산화 반응도 있습니다. 당과 아미노산이 고온에서 반응해 갈색을 띠는 마이야르 반응, 당류의 캐러멜화, 지방의 산패, 아스코르브산의 분해, 미오글로빈 변화 등도 색 변화에 관여합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숙성시킬 때도 이런 산화 반응이 활용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항산화물질’이란, 체내에서 유해한 산화 반응이 과도하게 일어나지 않도록 대신 산화되는 물질들을 말합니다. 산화는 생물 뿐만 아니라 무생물에도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철이 녹스는 것도 금속이 산소에 전자를 빼앗겨 산화물이 생성되는 현상이지요. 따지고 보니, 효소가 관여하든 하지 않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우리 주변 대부분의 물질은 산화 반응을 겪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 산화 반응은 그토록 흔하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는 '산화성 대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즉, 대기 중에 산소가 풍부하기 때문에 산화 반응이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죠. 산소는 전자를 받아 여러 산화 상태를 가질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언제든 전자를 강력하게 끌어당겨 받아들일 수 있는 산소 분자가 대기 중에 많이 존재하니, 전자를 내주기 쉬운 물질들과의 산화 반응이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생물체는 효소라는 천혜의 생촉매를 통해 반응 속도를 매우 빠르게 할 수 있어서, 산소가 충분하다면 산화 반응은 훨씬 더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지구 대기에 처음부터 산소가 많았던 건 아닙니다. 초기 지구는 질소, 메테인, 암모니아 등으로 구성된 환원성 대기였으며, 산소를 이용한 호흡이 불가능했지요. 그러던 중, 남세균(cyanobacteria)이 등장하면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남세균은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만들어낸 최초의 생물입니다. 이들이 만든 산소는 처음엔 철을 산화시키며 지표에 축적되었습니다. 그러다 포화 상태에 이르러 산소가 점차 대기 중으로 방출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를 ‘대산소화(Great Oxygenation Event, GOE)’이라고 부르며, 약 24억 5000만 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산소를 소비하는 호기성 세균과 호흡을 하는 생물들이 등장했고, 인류도 그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산화성 대기가 아니었다면 인류의 존재도 어려웠을 겁니다. 불을 피울 수 없었다면, 문명 또한 없었겠지요. 라부아지에의 발견도, 내연기관도, 열역학도, 전쟁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결국 문명조차 산화성 대기의 부산물인 셈입니다. 그런데 최근 인류가 만들어낸 산화 반응이 급증하면서 오존층이 얇아지고 있고, 이산화탄소와 메테인 등 온실가스 배출로 인해 지구 대기의 조성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구 대기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는 걸까요? 산화와 환원이라는 화학의 원리는,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문명의 발전, 그리고 미래 환경 변화까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