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의 세포에는 DNA를 담은 염색체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23쌍, 총 46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데요. 이 중 마지막 한 쌍이 바로 성 염색체입니다. 여성은 X염색체 두 개, 남성은 X염색체와 Y염색체를 각각 한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X염색체는 Y염색체보다 약 2.5배 더 길고, 유전자 수도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X염색체에는 약 800개가 넘는 단백질 코딩 유전자가 들어 있는 반면, Y염색체에는 약 70~80개의 단백질 코딩 유전자만 남아 있습니다. 길이가 차이를 감안해도 Y염색체에는 상대적으로 유전자가 적은 편이죠. 과학자들이 Y염색체를 ‘유전자 사막’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그렇다면 왜 Y염색체는 X염색체보다 짧고, 유전자가 이렇게 적어진 것일까요? 연구에 따르면, 약 1억 6천만~1억 8천만 년 전, 포유류의 공통 조상에서 Y염색체와 X염색체가 상동염색체로부터 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Y염색체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으며 독자적인 진화 경로를 걷게 되었죠.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가 ‘역위(inversion)'입니다. 역위는 염색체의 일부가 뒤집혀서 재배열되는 현상입니다. 어떤 염색체에 유전자가 ABCDEFG 순서대로 배열돼 있다고 합시다. CDEF에서 역위가 일어나면 그 염색체는 ABFEDCG 순서로 배열됩니다. 갖고 있는 유전 정보에는 변화가 없지만 순서가 뒤바뀌었죠. 이러한 변화는 유전자 순서를 바꿀 뿐만 아니라, 유전자 발현 조절 방식에도 영향을 주어 일부 유전자는 기능이 감소하거나 완전히 비활성화 되기도 합니다. 실제 X염색체에는 유전자가 EIF1AX, ZFX, RPS4X, RBMX 순으로 배열돼 있지만, Y염색체에는 RPS4Y, ZFY, EIF1AY, RBMY 순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유전자 순서가 뒤바뀌어 있죠. 사람의 X염색체와 Y염색체에는 같은 조상 유전자에서 유래한 여러 유전자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Y염색체는 오랜 진화 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역위, 유전자 소실(gene loss), 중복(duplication) 등을 겪으면서 X염색체와 염기서열 및 유전자 위치가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EIF1AX와 EIF1AY는 하나의 조상 유전자에서 유래했으나, EIF1AY는 현재 거의 기능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RPS4X와 RPS4Y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기원을 가졌지만, RPS4Y는 사람에게서는 거의 기능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 유전자들은 각각 X염색체와 Y염색체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게 되죠. 역위가 일어나면 염색체의 일부분에서는 유전자 재조합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재조합(교차, recombination)이란 감수분열 중 상동염색체 사이에서 유전자 구간이 서로 교환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유전적 다양성을 증대시키고, 손상된 DNA의 복구에도 기여합니다. 그러나 Y염색체에선 역위로 인해 해당 구간이 상동염색체와 정확하게 맞춰지지 않아 재조합이 억제됩니다. 결국 Y염색체에서는 돌연변이가 제대로 교정되지 못하고 축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능을 잃은 유전자들이 점차 소실되거나 비활성화 되죠. 반면 여성에겐 두 개의 X염색체가 있어 하나에 문제가 생겨도 다른 하나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즉 한 X염색체에 있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도 다른 X염색체에 정상적인 유전자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정상적인 표현형을 유지하죠. 또한 정상적인 X염색체를 주형으로 해서 재조합을 통해 건강한 상태로 회복합니다. 결과적으로, Y염색체는 상대적으로 ‘보완’될 수 있는 파트너가 없이 단독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불필요하거나 기능이 중복된 유전자들이 점차 제거되면서 간소화된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Y염색체는 남성에게 필수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Y염색체에 있는 ‘SRY’ 유전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유전자는 태아가 남성으로 발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Y염색체에는 정자 생산에 필요한 DAZ 유전자도 존재하죠. 즉, Y 염색체는 단순히 퇴화한 염색체가 아니라, 남성 생식과 관련된 필수 유전자를 선택적으로 보존한 결과물입니다. 생명의 역동성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빚어진 정교한 예술작품이군요. Y염색체를 보면, 진화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