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우리가 좋아하는 바나나가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전 세계 바나나 농장을 덮친 곰팡이성 질병인 ‘파나마병(Panama disease)’ 때문이었죠. 당시 사람들이 즐겨 먹던 바나나 품종은 ‘그로미셸(Gros Michel)’이었습니다. 문제는, 전 세계 농장에서 길러지던 그로미셸 바나나들이 유전적으로 거의 완전히 동일한 개체 집단, 즉 클론이었다는 점입니다. 거의 모든 바나나가 같은 유전자를 지닌 탓에 병원체에 대한 저항성도 같았고 파나나병에 똑같이 취약할수 밖에 없었죠. 전 세계 바나나 농장들이 초토화되며 바나나는 멸종 위기에 처했습니다. 다행히 농장주들은 또 다른 바나나 품종인 ‘캐번디시(Cavendish)’를 도입하면서 가까스로 이 위기를 넘겼습니다. 만약 대체할 품종이 없었다면, 지금쯤 바나나는 식탁에서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은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할 때 생물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성생식(asexual reproduction)’과 ‘유성생식(sexual reproduction)’이라는 두 가지 생식 방식의 차이가 자리하고 있죠. 그렇다면, 생물은 왜 두 가지 서로 다른 생식 방식을 진화시켜 온 걸까요? 생식은 생물의 가장 본질적인 임무 중 하나입니다. 생식이란 개체가 자신의 유전정보를 후대에 전달하여 종족을 유지하는 과정이죠. 이 생식을 실현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전략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성(sex)’을 사용하지 않는 무성생식(asexual reproduction)이고, 다른 하나는 성을 사용하는 유성생식(sexual reproduction)입니다. 먼저 무성생식을 살펴볼까요? 무성생식은 하나의 개체가 자신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박테리아나 아메바 같은 단세포생물의 ‘분열법’이 대표적이죠. 단세포생물이 세포분열을 하면 하나의 개체가 두 개의 개체로 나뉘게 됩니다. 다세포 생물 또한 무성생식을 합니다. 예를 들어, 말미잘은 몸에서 새끼 말미잘이 자라 떨어지는 ‘출아법’을 사용하죠. 식물은 줄기를 꺾어 땅에 꽂으면 새로운 개체로 자라는 ‘영양생식’을 통해 번식하기도 합니다. 바나나 역시 영양생식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일부 돌연변이를 제외하고는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한 개체들이 전 세계 농장으로 퍼져 나갔지요. 반면 유성생식은 자신과 유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냅니다. 감수분열을 통해 생식세포를 만들어내고, 서로 다른 생식세포의 수정이라는 세포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개체를 탄생시키기 때문이죠. 우리가 ‘성’이라고 하면, 여성, 남성 같은 성별이나 짝짓기 같은 성 행동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런 것이 없이도 유성생식은 가능합니다. 유성생식의 핵심은 ‘감수분열’과 ‘수정’입니다. 예컨대 빵을 빚거나 술을 담글 때 쓰는 효모 같은 단세포 생물도 감수분열과 세포 융합을 통한 유성생식이 가능합니다. 성별이나 복잡한 성 행동 없이도 유성생식의 핵심 과정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성생식과 유성생식 중에서 어떤 생식법이 더 ‘우월’할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어떤 생식 방식이 유리한지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무성생식의 장점은 명확합니다. 혼자서도 자손을 만들 수 있어 효율적이고, 우수한 형질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습니다. 농업에서 우량 품종을 대량 생산할 때 활용되는 이유죠. 하지만 유성생식에는 근본적인 비용이 따릅니다. 한 명의 자손을 만든다고 할 때 무성생식은 모든 유전자를 전달하지만, 유성생식은 절반만 전달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성생식이 유지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핵심은 ‘유전자의 뒤섞임’에 있습니다. 감수분열 과정에서 상동염색체끼리 교차(crossing over)가 일어나면서 유전자가 섞입니다. 또, 상동염색체의 분리도 무작위로 일어나죠. 이렇게 만들어진 생식세포가 또 다른 생식세포와 융합하여 새로운 유전적 조합이 생깁니다. 이런 유성생식의 가치를 극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 hypothesis)’입니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에서 붉은 여왕이 “제자리에 있으려면 죽어라 달려야 한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죠. 생물은 주변 환경이나 병원체, 기생충과 끊임없는 ‘군비 경쟁’을 하며 진화 속도를 늦추지 않아야 멸종을 피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가 동일한 무성생식 집단은 이 경쟁에서 뒤처지기 쉽지만, 유성생식 집단은 빠르게 유전자 조합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새로운 전략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무성생식의 또 다른 문제는 '멀러의 라쳇(Muller's ratchet)'입니다. 허먼 멀러(Hermann Muller, 1890~1967)가 제시한 이 개념은, 유전자가 복제될 때 생기는 작은 돌연변이가 계속 쌓여도 이를 되돌릴 마땅한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라쳇이란, 한 번 돌아가면 반대 방향으로 되돌릴 수 없는 장치를 말하죠. 무성생식 집단의 유전자도 이처럼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누적이 진행됩니다. 해로운 돌연변이가 쌓여도 유전자 조합을 바꿀 기회가 없기 때문에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취약해질 위험이 커집니다. 반면 유성생식은 서로 다른 유전자가 섞이며, 해로운 변이는 자연 선택을 통해 제거되고 이로운 변이만 모은 최적의 유전적 조합만 남게 됩니다. 아직까지 유성생식이 왜, 어떻게 진화했는지는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성의 진화 이후 생명 진화의 역사가 한층 더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바나나처럼,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한 생물은 여전히 같은 위기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생물의 생존 전략은,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