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쌍바를 처음 나눠 먹었던 날을 기억합니다. 하나로 연결된 두 개의 아이스크림을 공평하게 나누는 일은 의외로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자르는 순간, 한쪽이 조금 더 커 보이면 괜히 찜찜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친구와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두 조각이 정말로 똑같이 나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다가, '나눈다'는 것이 단순한 일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쌍쌍바는 겉보기엔 딱 절반씩 나눌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자르고 나면 한쪽이 조금 더 커 보이곤 했습니다. 그러면 괜히 미안한 마음에 작은 쪽을 제가 가져가곤 했습니다. 17세기에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삼각형 모양의 유리 프리즘을 사용해 태양 빛을 여러 가지 색으로 분해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프리즘을 통과한 백색광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등 여러 색으로 분리되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얀빛'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은 여러 파장대에 걸쳐 있는 다양한 색의 집합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일곱 가지 색깔을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하지만 태양 빛은 빨강에서 보라 사이에 무한히 많은 스펙트럼을 품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빛의 스펙트럼은 파장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할 뿐, 어디에도 "이 지점부터는 빨강, 여기서부터는 주황"이라고 나눌 수 있는 명확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깔로 구분하곤 합니다. 우리는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분류하고 나누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주화 사고는 복잡한 정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 유용한 도구입니다. 나누고 나누어도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무지갯빛의 스펙트럼을 일곱 가지의 색으로 이름 붙이면, 더 쉽게 기억할 수 있고 더 쉽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붉은 노을', '초록 잎사귀', '푸른 바다'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쉽게 이미지가 떠오를 겁니다. 분류하는 습관 덕분에 우리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판단하며 행동할 수 있습니다. 흔히 학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이런 범주화적 사고에 더 능숙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범주화 사고'에 너무 익숙해지면 오히려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연속되는 스펙트럼을 칸칸이 나눈 뒤 그 칸들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경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실제로는 서로 비슷한 두 색이 단지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빨강"이라고 부른 구간의 끝자락과 "주황"이라고 부른 구간의 시작 부분은 물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파장 대역을 공유하지만, 이들을 전혀 다른 색이라고 구분하며, 마치 큰 간극이라도 존재하는 양 받아들이게 됩니다. 둘째, 반대로 다른 속성을 가진 두 빛이 동일한 카테고리에 속한다면, 그 둘이 마치 완전히 같거나 최소한 상당히 유사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파란색이라 이름 붙인 영역 안에는 하늘색, 청록색, 남색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음에도, 그저 모두 '파란 계열'이라는 편리한 범주로 묶어버리고 미묘한 차이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이 색은 빨강이야 "이건 주황이야"라고 단정 짓는 대신, 스펙트럼의 미묘한 차이를 세심히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짧은 순간의 관찰이나 딱 잘라 정리한 범주만으로 사물을 정의하려 한다면, 본질을 무시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20세기 들어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가 제시한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빛의 스펙트럼을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정밀도에 비례하는 관측 시간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의 관찰은 그만큼 부정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빛의 스펙트럼 안에 숨은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빛의 흐름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긴 호흡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파장 사이에 감춰진 다채로운 색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무의식적으로 범주화하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습관은 때때로 세계를 이해하는 빠른 길잡이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미처 인식하지 못한 디테일을 놓치게 만듭니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이름표가 없이 존재하는 빛의 연속체이며, 그 다양한 파장 사이에는 명확한 담장이 없습니다. 때때로 이름 붙이기와 단정 짓기를 벗어나서 시간을 들여 차분히 바라보는 노력을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래 바라보고, 세심히 관찰할 때, 우리는 그 수많은 미묘한 디테일을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타인에게도요. 그 순간, '색'도, '사람'도 단일한 이름표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하나의 스펙트럼임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