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서 사과씨를, 소나무에서 솔방울 속의 소나무씨를 찾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사리에서 고사리씨를 찾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찾아봐도 씨는 없습니다. 대신 잎 뒷면에 갈색 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 뿐입니다. 이 점들이 바로 포자낭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씨와 달리, 포자는 먼지처럼 작아서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 정도죠. 우리가 익숙한 식물들 대부분은 포자가 아닌 ‘씨(seed)’로 번식합니다. 그런데 고사리는 포자만 만들고 씨는 만들지 않죠. 이 작은 차이가 식물 진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39만 종의 식물이 살고 있는데요. 이 중 37만 종이 씨를 만드는 ‘종자식물(seed plants)’입니다. 나머지 약 2만 종은 포자만으로 번식하는 식물들이죠. 그렇다면 약 3억 6천만 년 전 처음 등장한 종자식물은, 어떻게 씨라는 전략으로 식물계의 주류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씨 없이 살아가는 고사리는 왜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요? 대부분의 육상식물은 세대교번(alternation of generations)이라는 생활사(life cycle)를 갖고 있습니다. 이배체(2n) 세대인 포자체(sporophyte)는 감수분열을 통해 염색체 수가 절반인 반수체(n) 포자(spore)를 만듭니다. 이 포자는 체세포분열을 통해 자라서 배우체(gametophyte)가 되죠. 배우체에서 만들어진 정자(n)와 난자(n)가 만나 수정되면, 다시 이배체(2n)인 접합자(zygote)가 형성되어 자라면서 새로운 포자체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일부 식물들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전략을 택합니다. 수정된 접합자가 곧바로 포자체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씨(seed)라는 특별한 구조를 먼저 형성하여 발아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죠. 이런 식물들을 종자식물이라고 합니다. 식물의 생활사에는 동물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 대부분 세포는 이배체이고, 반수체 상태는 정자와 난자처럼 단세포로만 존재합니다. 반면 식물은 이배체와 반수체 세대가 모두 다세포로 존재하며,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고사리는 씨 없이 포자로 번식합니다. 우리가 보는 큰 고사리는 이배체(2n) 세대인 포자체입니다. 이 고사리가 포자를 만들어 날리면, 포자는 땅에 떨어져 자랍니다. 하지만 포자에서 자라나는 것은 그 고사리가 아닙니다. 동전 크기의 작은 하트 모양 식물체로 자라는데, 이것이 반수체 세대인 배우체입니다. 배우체에서 만든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되면, 다시 우리가 아는 큰 고사리로 자랍니다. 고사리의 경우 포자체와 배우체가 뚜렷이 구분되고, 두 세대 모두 눈에 보일 정도로 독립적인 생물체로 존재하죠. 포자식물은 이처럼 포자체와 배우체가 뚜렷하게 구분되며, 두 세대 모두 눈에 보일 정도로 독립적인 생물체로 존재합니다. 반면, 종자식물은 포자체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배우체는 매우 작아 포자체 안에 들어가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종자식물에서는 생식 구조가 더 복잡합니다. 꽃의 암술대 아래 속에 위치한 대포자낭에서 감수분열을 통해 4개의 대포자가 만들어집니다. 이 중 살아남은 하나의 대포자는 세 번의 체세포분열을 거쳐 8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암배우체로 발달합니다. 수술머리의 소포자낭에서도 감수분열이 일어나 소포자를 만들고, 이 소포자도 체세포분열을 하여 수배우체인 화분(꽃가루)이 됩니다. 화분이 바람이나 곤충의 도움으로 암술머리에 닿으면 수분(pollination)이 일어납니다. 화분에서 자라난 화분관이 암배우체 내부로 뻗어 정자를 난자까지 운반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속씨식물의 경우 중복수정(double fertilization)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정자는 난자와 결합하여 배(2n, embryo)를 만들고, 다른 정자는 두 개의 극핵과 결합하여 배젖(3n, endosperm)을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종자는 배와 배젖, 그리고 이를 보호하는 종피(seed coat)로 구성됩니다. 종자는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면 발아하여 새로운 식물로 자랍니다. 포자와 종자 중 누가 더 유리할까요? 이 둘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종자식물이 진화적으로 우세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조적 차이입니다. 포자는 단세포로 영양분이 거의 없습니다. 반면 종자는 다세포 구조로 풍부한 영양분을 저장한 배젖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단단한 종피로 보호받죠.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대추야자 씨가 2,000년 만에 발아한 사례는 종자의 뛰어난 보존 능력을 보여줍니다. 둘째, 환경 적응력의 차이입니다. 포자는 주로 온화하고 습한 환경에서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건조하거나 극한 환경에서는 빠르게 생존력을 잃죠. 반면 종자는 건조, 한랭 등 다양한 환경에서도 오랜 기간 생존할 수 있습니다. 셋째, 분산 능력의 차이입니다. 포자는 주로 포자체 근처에 떨어져 확산 범위가 제한적입니다. 종자는 바람, 물, 동물 등 다양한 방법으로 멀리까지 운반되어 새로운 서식지 개척에 유리합니다. 넷째, 발달 과정의 차이입니다. 포자는 반수체이므로 직접 성체로 자랄 수 없습니다. 배우자체 단계를 거쳐야 하죠. 종자는 이미 수정이 완료된 이배체 상태이므로 조건만 맞으면 바로 성체로 자랄 수 있습니다. 다섯째, 유전적 다양성 정도의 차이입니다. 포자는 정자나 난자 정도의 유전적 다양성을 지니지만, 씨는 이 두 세포가 수정되어 생겼으므로 정자와 난자의 경우를 곱한만큼 유전적 다양성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포자는 진화에서 밀려난, 실패한 전작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약 4억 7천만 년 전, 식물이 바다에서 육지로 진출할 때 포자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도 열대우림이나 습지 등 포자에 유리한 환경에서는 고사리와 이끼류가 번성하고 있죠. 포자로만 번식하던 식물들이 종자식물의 조상이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리고 종자식물이 출현한 이후에도, 환경에 따라 비종자식물이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점도 포자의 중요한 기여라 할 수 있죠. 포자식물과 종자식물의 공존과 경쟁은, 생명이 환경에 적응해가는 다양하고 놀라운 방식을 보여주는 멋진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