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더 빨리 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대부분 차가운 물이 더 빨리 얼지만, 분명히 그렇지 않은 경우가 존재하는데요. 이 신기한 현상을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라고 부릅니다. 이 현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60년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고등학생, 에라스토 음펨바(Erasto Mpemba, 1950-2023)입니다. 그는 끓는 우유로 아이스크림을 만들던 중 이 현상을 처음 알아차렸습니다. 뜨거운 우유 혼합물이 더 빨리 얼어붙는 걸 보고, 물리학자 데니스 오스본 교수(Denis Osborne, 1932-2014)에게 문의했죠. 오스본 교수는 흥미롭게 받아들였고 공동연구를 통해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더 빨리 어는 걸까요? 수십 년에 걸쳐 여러 가지 이론과 가설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설이 대두되었지만, 대표적인 세 가지 가설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대류현상 가설입니다. 뜨거운 것은 위로, 차가운 것은 아래로 이동하는 열의 이동 원리를 생각해 봅시다. 뜨거운 물은 표면에서 더 많은 열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물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가 커지고, 표면에서 차가워진 물이 아래로 이동하는 대류 현상이 강해집니다. 결과적으로 뜨거운 물 전체의 열을 빠르게 방출시켜 냉각이 빨라진다는 가설입니다. 둘째, 과냉각 가설입니다. 과냉각은 액체 상태를 유지하면서 온도가 어는점 이하로 내려가는 현상입니다. 차가운 물은 0 °C 이하에서도 얼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과냉각 상태에 빠질 수 있지만, 뜨거운 물은 과냉각 상태가 잘 일어나지 않아 더 빨리 얼 수 있습니다. 셋째, 물 분자의 구조 변화에 대한 가설입니다. 물 분자는 1개의 산소 원자와 2개의 수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분자들이 또다시 분자 간 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의 온도가 오르면 물 분자 내부의 원자간 결합이 더 강해지는데, 이러한 초기조건의 차이가 음펨바 효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같은 속도로 같은 경로를 달린다면 후발 주자는 레이스에서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이 규칙은 자명합니다. 똑같은 이유로, 70 °C의 뜨거운 물과 30 °C의 차가운 물을 동시에 냉동고에 넣으면, 70 °C의 물은 30 °C의 물보다 더 빨리 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왜 더 높은 온도에서 출발한 물이 뒤늦게 시작하고도 먼저 얼 수 있을까요? 단순히 물의 현재 온도뿐 아니라, 그 물이 어떤 길을 지나왔는가. 즉 과거의 이력까지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메모리 효과(memory effect)’라 부릅니다. 물리계는 순간순간의 상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를 기억하고 그 기억에 따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 구조 어딘가에 과거의 정보가 새겨져 있고, 그 흔적은 이후 전개될 미래에도 미묘하고도 깊은 영향을 끼칩니다. 뜨거웠던 물이 “내가 한때 70 °C였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처럼요. 결국 동일한 30 °C의 지점에 도달한 두 컵의 물이라 해도, 한 컵은 뜨거움을 겪고 식어 내려온 기억을 품은 채, 다른 컵과 전혀 다른 속도로 다음 단계를 밟아갑니다. 그렇다면 물처럼 투명하고 단순해 보이는 존재가 도대체 어디에 과거를 저장할 수 있을까요? 기억을 저장하는 변수가 있다면, 온도나 압력처럼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변수는 아닐 것입니다. 기억은 가장 깊은 내부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저장되어야 합니다. 수소결합의 미세한 재배치, 분자 구조의 섬세한 변화 같은, 쉽게 관측할 수 없는 정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기억의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상태나 위치에 도달한 두 개의 물체라도,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에 따라 미래의 모습은 천지 차이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메모리 효과가 없다면 주어진 시스템은 현재의 상태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 경우 상황은 훨씬 단순해져, 과거의 흔적이 미래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메모리 효과가 존재한다면,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축적되어 앞으로의 흐름을 미묘하게 재구성하는 재료가 됩니다. 우리 우주의 경우는 어떨까요?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리 우주는 닫힌 우주입니다. 이는 우주가 스스로의 상태 변화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끊김이 없이 이어가며, 내부에 모든 기억을 품은 채 진화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만약 우리가 열린 우주, 즉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환경을 상정한다면 어떨까요? 그런 경우 외부 환경은 시스템이 지나온 경로를 흡수하는 거대한 기억 저장고가 될 수 있습니다. 외부 환경에 흩뿌려진 정보 조각들은 일정한 방향 없이 흘러 다니면서, 미래의 모습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닫힌 우주든 열린 우주든, 과거는 소실되지 않는 정보로써 어딘가에 새겨져 있으며, 곧 다가올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도 과거가 되어 다음 미래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매 순간 내리는 선택과 결정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 지나온 과거의 흔적과 기억이 미묘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나간 것은 단지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다음 순간을 빚어내는 의미 있는 재료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