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하면 떠오르는 말 중 하나가 ‘생존본능’입니다. 생물은 죽음을 피하고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죠. 그런데 이 생존본능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세포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세포자살(apoptosis)’입니다. 세포가 의식을 지닌 것도 아닌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니요. 세포는 물리적 손상을 입거나 병원균의 공격을 받아 죽을 때가 있습니다. 이를 괴사(necrosis)라고 하는데 일종의 ‘타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이나 손상 없이도 세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세포자살’을 밝혀내는 데 작은 벌레가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바로 예쁜꼬마선충($\textit{Caenorhabditis elegans}$)입니다. 예쁜꼬마선충은 다 자랐을 때 몸길이가 1m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고 투명한 벌레입니다. 이 벌레는 세포자살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200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노벨상 공동 수상자 중 한 명인 존 설스턴(Sir John Sulston, 1942-2018)은 예쁜꼬마선충 수정란이 완전한 성체가 되는 과정을 현미경으로 반복 관찰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공장에서 로봇들이 똑같은 가전제품을 찍어내는 것처럼 모든 수정란에서 동일한 발생 과정을 통해, 정확하게 같은 숫자의 세포로 이루어진 예쁜꼬마선충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똑같은 세포들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똑같은 세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세포의 분열(생성)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반복되고 있었던 겁니다. 모든 예쁜꼬마선충에서 1,090개의 세포가 만들어지지만 131개의 세포가 죽고, 그 결과 959개의 체세포만 살아남아 성체를 이루고 있었죠. 게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세포가 개체마다 동일했습니다. 배아 발생이 진행되는 동안 같은 시간, 같은 위치에서, 같은 세포로부터 나온 세포들이 죽었습니다. 이는 세포자살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의미했습니다. 이를 두고 설스턴을 포함한 영국 케임브리지의 MRC 분자생물학연구소의 예쁜꼬마선충 연구진은 가설을 세웠습니다. 세포자살 ‘프로그램’이 모든 배아 속에서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가설이었죠. 그리고 역사적인 실험을 진행합니다. 세포자살 프로그램이 DNA라는 하드웨어 속에 저장되어 있다고 본 과학자들은 수많은 예쁜꼬마선충에 화학물질을 처리하여 인위적으로 DNA를 망가뜨렸습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세포가 죽지 않는 ‘좀비’ 돌연변이들을 찾아냈습니다. 이러한 돌연변이 벌레의 망가진 유전자에겐 $\textit{ced-}$ 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세포의 죽음 현상이 망가졌다는 뜻의 ‘cell death abnormal’에서 유래되었죠. 설스턴과 함께 200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로버트 호비츠(Robert Horvitz, 1947~) 교수는 1993년, 놀라운 발견을 합니다. 그의 MIT 연구팀이 $\textit{ced-3}$ 유전자를 예쁜꼬마선충의 DNA 속에서 찾아냈는데 그 유전자와 똑같은 유전자가 우리 인간의 DNA 속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죠. 이후 세포자살 프로그램의 구성 유전자들이 낱낱이 발견되었고, 예쁜꼬마선충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핵심 유전자들로 구성된 세포자살 프로그램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속에서 세포자살 혹은 프로그램된 세포 죽음(programmed cell death)은 무슨 일을 할까요? 우선 예쁜꼬마선충에서처럼 발생 과정에 기여합니다. 예컨대 인간의 손과 발은 배아 발생 시기에 물갈퀴 같은 형태를 가집니다. 그런데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위치한 세포들의 세포자살이 진행되면서 또렷한 손가락과 발가락을 형성하게 되죠. 또한 원래 배아 발생 초기에는 성별에 상관없이 양쪽 생식기관을 모두 형성할 수 있는 양잠재성 생식선(bipotential gonad)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남성에서는 여성 생식기의 전구체가, 여성에서는 남성 생식기의 전구체가 세포자살 프로그램을 통해 퇴화하면서 각 성별에 맞는 생식기를 갖추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포자살은 암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암세포는 무한히 증식하는 특성이 있는데요. 이러한 암세포에서는 세포자살 프로그램이 망가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무분별하게 증식하는 세포는 세포자살 프로그램을 통해 제거되어야 합니다. 면역계에서도 세포자살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면역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를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은 공격하지 않고 외부에서 침입한 나쁜 병원균들만 공격해야 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자기 몸을 공격하는 면역세포들이 세포자살로 제거되지 않으면 ‘자가면역 질환’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세포자살은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헌팅턴병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세포자살 활동으로 신경세포들이 예정보다 일찍 사멸하면 이러한 질환의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죠. 이처럼 세포자살 프로그램이 잘못 켜지거나 꺼지는 경우를 잘 공략하면 다양한 치료 전략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암, 자가면역 질환, 신경퇴행성 질환 등의 진행을 늦추거나 개선할 수 있는 것이죠. 예쁜꼬마선충 연구를 통해 밝혀진 세포자살 프로그램과 그 핵심 유전자들의 작용은 우리 자신의 발생과 생리, 그리고 의학적인 의미가 매우 큽니다. 200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