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태양계의 행성을 태양에 가까운 순으로 나열한 것입니다. 이 순서에 태양계 형성에 얽힌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행성은 크게 암석형 행성과 가스형 행성으로 나뉩니다. 암석형 행성은 단단한 지반이 있고, 그 위를 얇은 대기가 감싸고 있습니다. 지구가 바로 암석형 행성입니다. 가스형 행성은 거대한 가스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심에는 매우 작은 크기의 암석핵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스층이 너무 두꺼워 핵의 크기와 같은 물리적 특성에 관해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가스형 행성은 대부분 수소와 헬륨 기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태양계 행성의 순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수성부터 화성까지 앞의 네 행성은 모두 암석형 행성입니다. 목성부터 해왕성까지는 모두 가스형 행성입니다. 암석형 행성은 태양 가까이 있고, 가스형 행성이 모두 멀리 있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태양계 형성 초기 단계에서 일어난 복잡한 물리적 과정이 있습니다. 태양계 행성의 형성과 배열을 설명하는 데 가장 널리 쓰이는 이론은 2000년대에 등장한 니스 모형입니다. 프랑스의 도시 니스에 있는 코트다쥐르 천문대에서 개발된 모형이라 니스 모형이라고 불립니다. 47억 년 전 태양은 갓 태어난 신생 항성이었습니다. 그 주위는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고 남은 가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가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거대한 원반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가스 안에는 아주 작은 비율이지만, 철, 니켈, 규소, 마그네슘 같은 무거운 원소로 이루어진 먼지도 있었습니다. 이 먼지는 서로 충돌하며 뭉쳐 알갱이를 이루다 마침내 원시 행성의 씨앗(embryo)이 되었습니다. 원시 태양이 빛을 뿜기 시작한 뒤 겨우 1000만 년 만에 원시 행성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먼지와 가스는 태양에 가까울수록 온도가 높습니다. 그래서 태양에 가까운 가벼운 물질은 속도를 얻어서 태양의 중력을 이기고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그 결과 가벼운 원소는 모두 태양계 외곽으로 날아가고, 무거운 원소만 남아 행성을 이루었습니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같은 암석형 행성이 태양 가까이에 있는 이유입니다. 이들은 주로 철, 규소, 마그네슘 등의 무거운 원소로 이루어져 밀도가 높고 크기도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태양에서 먼 곳에서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이곳은 온도가 낮아 가벼운 기체도 안정적으로 궤도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양에서 먼 원시 행성은 태양 근처에는 없는 가벼운 기체까지 모두 중력으로 포획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원시 행성은 거대한 질량을 갖게 되었고, 계속해서 더 많은 가스와 먼지를 끌어모아 거대한 가스형 행성이 되었습니다.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태양계의 가스형 행성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생겨났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모든 행성이 지금보다 더 다닥다닥 붙어서 태양을 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지금처럼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었을까요? 니스 모형은 서로 가까운 곳에서 태어난 가스형 행성의 중력적 상호작용으로 설명합니다. 목성과 토성처럼 가까이 붙어 있던 거대 가스형 행성이 서로 중력의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 궤도가 불안정해지다가 지금처럼 멀어지면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는 겁니다. 가스형 행성의 궤도 변화는 단지 그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를 태양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로 만들었지요. 거대한 중력을 지닌 가스형 행성의 궤도 변화는 주변에 있던 작은 소행성들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태양계에는 수많은 소행성과 혜성이 태양계를 무질서하게 돌아다녔습니다. 소행성과 행성의 충돌도 매우 빈번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시기를 후기 대충돌 시대(Late Heavy Bombardment era)라고 부릅니다. 이때의 흔적은 수성이나 달의 크레이터로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니스 모형은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그동안 설명하기 어려웠던 행성의 위치나 후기 대충돌 시대를 모두 설명해 내면서 가장 유력한 태양계 형성 이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