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Lewis Carrol, 1832~1898)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1871)를 아시나요? 소설 속에는 앨리스가 붉은 여왕이라는 인물과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달리는 장면이 있는데요. 이때 앨리스가 붉은 여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붉은 여왕님, 정말 이상하네요. 지금 우리는 아주 빨리 달리고 있는데, 주변의 경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아요” 붉은 여왕은 이렇게 대답하죠. “제자리에 남아 있고 싶으면 죽어라 달려야 해.” 미국의 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Leigh van Valen, 1935~2010)은 이 장면을 바탕으로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 hypothesis)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아니 제자리에 남아 있기 위해서라도 주변보다 더 빨리 진화해야 함을 의미하죠. 붉은 여왕 가설을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주제는 포식자-피식자 또는 숙주-기생자 상호작용입니다. 포식자는 피식자를 효율적으로 잡아먹기 위해 탐색하거나 포획하는 방법을 개선합니다. 이는 피식자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죠. 그래서 피식자 역시 포식자를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방법을 개선합니다. 그런데 만약 진화적인 시간 동안 포식자와 피식자 모두 방법을 개선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비록 전술은 바뀔지 몰라도 각자의 상대적인 성공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서로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하는 예는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펼쳐지는 박쥐와 밤나방의 치열한 공중전이 대표적이죠. 밤나방은 해가 지면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박쥐는 이렇게 밤에 비행하는 곤충을 노리죠. 박쥐는 초음파를 내보낸 다음 되돌아오는 소리를 분석해 밤나방을 사냥합니다. 밤나방은 이에 대응하여 청각기관을 진화시켜 효과적으로 박쥐의 초음파를 탐지하고, 회피하거나 불규칙하게 비행해서 박쥐를 피하죠. 박쥐는 변화하는 밤나방의 전술에 대응해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습니다. 밤나방이 예민하지 않은 주파수 대역의 초음파를 사용하거나, 소리의 세기를 낮춰 스텔스 모드로 밤나방을 공격하죠. 이렇게 밤나방과 박쥐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생존 전술을 새로 개선하고 있습니다. 밤나방과 박쥐가 서로 진화적인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연 붉은 여왕 가설이 정말로 타당한지 증명할 수 있을까요? 붉은 여왕 가설을 증명하려면 서로의 전술은 변화하지만 상대적인 성공도는 일정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줘야 합니다. 현재의 포식자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피식자보다 과거의 피식자에게 더 높은 포식 성공율을 보여야 하죠. 포식자가 과거의 피식자의 방어법을 극복하도록 진화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피식자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포식자보다 과거의 포식자에게 더 높은 방어율을 보여야 하고요. 그런데 이를 증명하려면 현재의 개체군과 과거의 개체군 간의 경쟁을 시켜봐야만 합니다.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죠. 그러나 2007년 한 놀라운 연구에 의해 붉은 여왕 가설이 타당하다는 것이 증명됐습니다. 이 연구는 다프니아 마그나($\textit{Daphnia magna}$)라는 물벼룩과 파스퇴리아 라모사($\textit{Pasteuria ramosa}$)라는 세균의 상호작용을 이용했습니다. 이 물벼룩은 새각류(Branchiopoda)라고 하는 절지동물의 한 종류이고, 세균은 물벼룩의 내부기생자입니다. 숙주와 기생자 관계인 것이죠. 이들은 호수와 같이 흐름이 거의 없는 정수 서식지(lentic habitat)에 주로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환경 조건이 나빠지면 모두 휴면기에 들어갑니다. 휴면기에 들어서면 호수의 침전물로 쌓여 ‘살아있는 화석’이 되기도 하죠. 호수 바닥의 얕은 침전물 층에 있는 숙주와 기생자는 비교적 최근에 휴면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침전물 층 깊은 곳에 있는 숙주와 기생자는 이보다 훨씬 오래 전에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죠. 이들을 호수 바닥에서 추출해 다시 적당한 조건을 만들어주면 휴면에서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한 시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및 미래에 존재하는 숙주와 기생자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죠. 현재의 숙주를 현재와 과거의 기생자에 노출시켜 봤더니, 현재의 기생자가 과거의 기생자보다 훨씬 더 높은 감염률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숙주의 감염율은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즉 기생자는 숙주의 과거 유전자형을 극복하도록 진화했고, 숙주도 기생자의 과거 유전자형에 적응하도록 진화한 것이죠. 이는 숙주와 기생자의 상대적인 성공도는 세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와 붉은 여왕처럼 물벼룩 숙주와 세균 기생자 역시 열심히 달려야만 현재의 성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존은 반복되는 진화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꾸준히 전진하지 않으면 곧 뒤처집니다.